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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REVIEWS/음반 ALBUMS

손영지 [내가 서있는 풍경] (2000)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7. 26.
사용자 삽입 이미지


produced by
손영지, 김도현

(2000/Color)




오랜 기간동안 여러 앨범에서 활동해온 게스트 세션이나 보컬이 솔로 앨범을 낼때의 과정과 결과는, 당연히 신인가수들의 그것과는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우선 그의 음악적인 행보를 예의 주시해온 팬들의 시선으로 기대는 당연히 배가될 수 밖에 없겠죠. 그들의 솔로 선언은 어떻게 보면 팬들에 게는 하나의 선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용두사미가 되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노장들의 캐리어를 무시할 수는 없는 겁니다.


손영지의 앨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의 경력 자체는 대부분 주찬양이라는 큰 프로젝트에 귀속되어 왔지만, 이후 좋은씨앗이나 아가파오, 김명식, 시편23편, 부흥 등 다양한 앨범에 등장해왔던 경력도 결코 짧지 않은 기간동안 이뤄졌죠. 이런 사람이 앨범을 낸다면... 이라는 상상은 국내 가스펠 애호가라면 분명 해볼만 했겠고, 그 응답인 [내가 서있는 풍경]이 만들어 졌습니다.


손영지의 첫 솔로 앨범은 많은 부분에서 극찬을 받을만 하지만, 그 중에서 제일 발군은 앨범의 컨셉트가 확실히 잡혀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앨범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는' 앨 범이라는 의미지요. 어떻게 보면 가수가 앨범을 만들 때 제일 기본적인 생각을 가져야 할 부분이기도 하지만, 컨셉 콤플렉스에 걸린 마냥 주변 앨범, 혹은 가수들의 테마를 끊임없이 복제해내는 국내 CCM 동향의 한 단면을 생각해보면 이는 큰 미덕입니다.


여기에 테마의 직설적인 화법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수직적인 메시지로서의 직설적인 화법이 아니라, 말그대로 가수가 하고 싶은 말을 여과 없이 펼치고 있다는 의미에요. 앨범을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내가 서있는 풍경]이라는 제목 자체로 가수 개인의 성장사와 그 주변 의 이야기들이 뼈대를 이룬 앨범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앨범의 트릴로지-"여섯", "스물", "서른"-와 가족사적인 부분을 다룬다고 할 수 있는 "엄마에게" 같은 곡들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 곡들을 제외한 나머지 곡들도 그 배치에 있어서 다른 곡과 자연스레 어울리고 있습니다. 초반의 "아버지"나 "아침시편"이 현재라는 시점에서의 묵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면, "당신은 누구", "나 당신을" 같은 곡들에서는 동시대의 타인에게 보내어지는 손길을 그리고 있습니다. 시공간 적으로 '지금'과 '여기'의 의미를 담고 있는 셈이지요.


따라서 타이틀 트랙인 "내가 서있는 풍경"이 연주곡으로 수록된 것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별로 이상할게 없습니다. 앨범의 수록곡들 전체가 말하고 있는 테마가 손영지의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와 그 주변을 모두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죠. 타이틀 인스트루먼탈은 말 그대로 앨범의 '간판' 역할로 보면 되겠지요.


이렇게 앨범의 테마가 확실하다 보니 미국곡의번안인 "아버지의 편지"와 "온 맘 다해"는 다소 부록과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할런 로저스 -해들리 하켄스미스와 세트(?)로 유명한 연주자죠- 의 "아버지의 편지"는 오프닝 곡인 "아버지"와 수미쌍관으로 연결시킬 수야 있지만, 바비 메이슨의 "온 맘 다해"는 앨범의 줄기와 분리되어 대미를 맺는 프레이즈송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하기야 앨범의 메시지들이 담고 있는 균형을 위해서 필수적인 선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컨셉 아래 적재적소로 배치될만한 곡의 구성도 기대할만한 앨범이지만, 음악적인 부분에 있어서 개성이 남다른 정도는 아닙니다. 물론 메시지가 주는 후광효과도 컸겠지요. 무엇보다도 김도현이 제작했던 여타 앨범과 그 느낌이 비슷하다는 점이 크게 남고요.


특히 연주나 편곡 부분은 이런 선입견을 쉽게 지우기 힘듭니다. 하지만, 일관된 손영지의 보컬이 결정적인 차별성을 느끼게 해주고 있습니다. 또, 곡들 느낌의 고저가 앨범을 싸고 있는 테마와 잘 부합된 점도 훌륭합니다. 특히 앞서 말했던 트릴로지의 세 곡은 이런 부분을 작곡, 혹은 작사 초기부터 완전히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인양 기성복처럼 재단된 인상을 줍니다.
 

앨범에서 음악적인 메리트를 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번안곡들인데요, 이것은 곡 자체의 훌륭함보다는 앨범전체를 볼 때 일관된 느낌에 서 다른 코드와 멜로디의 흐름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또 전체적인 차분함 때문에 귀에 들어오는 트랙은 상대적으로 "스물" 같은 생동감 있는 곡들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지극히 상대적인 선택일 뿐이고, 각각의 발라드곡들의 면모는 일관된 흐름안에서 비교적 잘 만들어진 곡 들입니다. 그러나 더 다양한 리듬과 비트 (여기에 '장르' 까지 포함시킬 필요는 없겠지요)가 가미되었다면 하는 아쉬움은 여전히 남습니다.


인스트루먼탈을 포함한 11개의 트랙이 부담스럽지도 않기 때문에 모든 곡들은 절약된 흐름을 보여줍니다. 이런 앨범에서 많은 이야기를 가사 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노래들을 따라 만들어진 것 같은 화이트톤의 자켓 디자인과 더불어 손영지의 데뷔 앨범은 많은 면면에서 차분함을 보이고 있지만, 의외로 손영지 자신에게는 꽤 고집스럽고 엄한 노력의 노작이었을 것이라는 예상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앨범에는 많은 책임이 따르는 법인데, 손영지도 이 책임을 피해 갈 수 없을 것 같군요. 기라성같은 세션들과 우군들이 참여한 앨범이 지만, 다음 앨범에서는 음악적인 다양함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 앨범을 기대해봐도 될 듯 합니다. 섵부른 장르 전환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지만, 이 중고신인의 역량은 이것을 잘 제어할 수 있을거라 봅니다.


제게도 큰 인상으로 남을 만한 앨범입니다. 국내 앨범 리뷰의 스타트 를 끊을 앨범을 고른다는 것은 꽤나 엄한 선택이었거든요.

(2000/11)